[자작] 별

외롬서재/Essay 2006.11.20 15:37


밤하늘의 별들은 스스로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닿은 내 맘으로 빛을 내며
가여운 마음이 더더욱 간절하면
대낮의 지상에도 별들이 나타난다.

여기 지상의 반짝이는 것들은
하늘의 별만큼 오롯하지 않아
오고 물러남이 외행성 같고
밝고 어두움이 변광성 같고
때로는 청색 편이를 일으키고
갑자기 적색 편이로 놀래킨다.

해서 별보기를 즐기는 사람은
그 한 번 별빛을 똑바로 보기 위해
명멸하는 순간 퍼져가는 황홀의
끄트머리라도 붙잡아 간직하기 위해
온숨을 멈추며 가슴을 떨고
어쩌다 다가오는 그 별 때문에
밀물 같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생채기 8집(2004)에 실린 시
posted by Saruman
유예(猶豫)

오늘,
빈 교통카드에 5천원을 충전해서
학교 대신 일터로 유난히도 깊은 5호선을 타고 가다
지갑을 가방에 넣고 빈 자리에 앉으며
내년의 일을 생각하는데
작년에도 그때의 내년을 생각했던 일이 생각나
재작년에도 그때의 내년을 생각했던 일을 생각하고
내년에도 그 후의 내년을 생각할 것을 생각하다
옛 친구를 수십 번, 소처럼 되새김질하듯
술집에서 만나고 학교에서 만나는 것도 생각하고
집에서는 만나지 않지만 꿈꾸면서는 만나는데
옛 꿈들은 더 이상 꾸지 않고
대신 그걸 계산하고 렌즈를 대어보듯
자꾸 들여다보고 햇볕에도 내어보고 하다보니
종이가 묵듯 누렇게 바래고
그 종이 위의 몇몇 변수들이
초기값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나는 조금 아파오기 시작한다

건너편 자리에 머리가 까만
긴 머리에 교복 입은 여고생이 앉아있는데
나는 그 애가 나와 사귈 마음이 있는지 궁금하고
나는 기꺼이 그럴 마음이 있고
원한다면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줄 수도 있고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하는 고교생활이라면
역겨운 선생들이 좀 있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일 것이고
그렇다면 아마도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그 애와 헤어지고 곱게 하늘에다
날 던져버리는 것으로
생을 끝낼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그 애는 어느새 내려버렸다

꼬마 아이 둘이 내 옆에 앉는다
쌍꺼풀이 있는 언니는 제 엄마와 놀고
쌍꺼풀이 없는 동생은 짧은 다리를 흔들어댄다
유리 같은 저 살에도 상처가 생길까
물개 같은 저 눈에도 눈물이 있을까
졸린지 그 눈을 감고 이젠 고개를 흔들다
내 옆구리에 와 닿는데
나는 오늘 이 아이의 머리를 받쳐주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게 아닐까
무거운 발을 떼다 문득 하늘을 본 여행자의 눈에 띈 아무도 보아주지 않던 별처럼
나도 오늘 이 아이가 하늘로 가는 꿈을 편히 꾸도록 하기 위해 여태 살아온 건 아닐까
여기도 저기도 아이의 숨소리가 들린다
울지 마 울지 마 한다
그래 오늘은 아무래도 좋다
오늘은 아무래도 좋다


*생채기 8집(2004)에 실린 시
posted by Saruman

[자작] 기다림

외롬서재/Essay 2006.10.23 16:37
기다림

빽빽한 숲도 겨울이면
잎이 다 떨어져
나무들은 흰 눈 쌓인 위에
장대비가 내린 듯 박혀있다.
창에 일부러 입김을 내어
소매로 문질러 본다.
살짝.
그러나 창문을 열면
바람이 부는 만큼 넘어가는 책장엔
꽃잎같이 흔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묵은 먼지가 날려 코에 닿으면
재채기가 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이름들이 튀어나와 유리에 달라붙었다가
산으로 날아간다. 그러면 나는
하나씩 둘씩 그 이름들에
이파리가 붙을 봄을 기다리며
시간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생채기 7집(2003)에 실린 시로 군대 있을 때 쓴 것이다.
posted by Saruman
     1959년             이성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것도 追憶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posted by Saruman
피해 망상

사랑에 빠진 나 같은 이에게
사랑해 주지 않는 그대는
차라리 미워하는 그대일까?

그래서 난 그대의 무심한 행동에서
있지도 않은 의미를 읽어낸다.
스치지도 않고 지나치는 눈길,
지루한 듯 생기 없는 말,
슬며시 빼는 손,
그대의 차가움, 그 차가움.

그대는 아니라지만, 그대는 아니라지만
나는 그대에게서
미움을 읽는다.
아니, 사랑이 없음보다 차라리 미워하길 바래
무에서 유를, 계란에서 뼈를 찾아낸다.


*생채기 5집(2001) 수록
posted by Saruman

[자작] 책읽기

외롬서재/Essay 2006.09.06 13:00
책읽기

1900년대가 마감되던 해
나의 10대도 끝나갈 무렵
그 때 나는 네 권의 책을 읽었다.

두꺼운 표지에 화려한 그림까지 그려진 책은
불행히도 외국어로 쓰여있어
난 얼굴을 붉히며 책장을 넘길 수 밖에 없었는데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할 수 없어
그 책은 자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방랑의 길을 떠나버렸다.

검은 가죽을 두르고 붉은 줄까지 달려있는 종이가 얇고 글씨가 많은
그 또 다른 책의 작고 아름다운 글씨체와
우울한 이야기에 마음이 몹시도 끌렸지만
매일 밤 첫 장을 넘어가지 못해
언제나 책장 위에 놓여있기만 할뿐
영원토록 마지막 장을 보여줄 것 같지 않았다.

밝고 흥겹고 다채로운 그림이 반짝이는 종이에 그려진 책은
언제 어느 쪽을 펴도 재미있었지만
너무나도 가볍게 그 빛나는 몸체를 날리어
나를 스쳐지나가고 다시 스쳐오며
다른 책들 사이에서 노니는 듯 했다.

날개 달린 평범한 표지에 흥미진진한 줄거리를 담은
마지막 책을 읽으며 삼매경에 빠졌지만
웬일인지 어느 부분부터
중간중간 글자가 보이지 않고 쪽수가 바뀌어
나를 어지럽히고 놀라게 했다.

내 마음 속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떨어진
파문과 같았던 책들.
하지만 동심원이 지나간 자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나의 독서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
  이상의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생채기 4집(2000) 수록
posted by Saruman

[자작] 무신론

외롬서재/Essay 2006.09.03 22:42
무신론

사랑이여
열정이여
내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은 없다
열정을 담아 사랑의 마음으로
불러본 적은 없다

지난날의 사랑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거짓된 마음일 뿐이었으며
지난날의 열정은 열정이라 부를 수 없는
부족한 마음일 뿐이었으리라

그러리라

나는 언제고 그것들을 잡을 수 없으리라
새의 지저귐이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하늘이 대죄를 벌하지 않듯이
우리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요
하늘의 정기를 이어받은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지고의 가치가 존재하던가
영원은 한낱 바람이요,
  격렬한 고통조차 찰나로 스쳐가고,
    넘치는 환희는 자기 기만일 뿐이다.

오직, 오직 번뇌만이 있을 따름이니.



*연세시학 문집 <생채기>4집(2000)에 실림.
posted by Saruman

        A Drinking Song


              William Butler Yeats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posted by Saruman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posted by Saruman
  며칠 전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했다. 일본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곧 고이즈미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가며 고이즈미의 도박이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기사에 대해선 특히나 심층보도가 떨어지는 우리나라의 언론만 보면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이번 해산의 계기가 된 것은 우정 민영화 법안이 부결된 것이다. 그런데 국내 언론들은 고이즈미 내각의 인기도나 신사 참배, 야당과의 관계 등 정치적인 사안만 다루고 있고 정작 이 법안과 관련된 일본 국민들이나 의원들의 생각은 다루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실상 우정 민영화는 개혁 법안이고 일본 국민들은 과반수가 이 법안을 지지하고 있다.

  일본의 우정국은 우편 사업은 물론 금융 사업도 함께 하고 있다.(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다는 이점과 정부 조직으로서의 신뢰성 때문에 우정국은 많은 예금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그것이 이점이 될 수 없고 민간금융기관에 비해 수익이 매우 떨어진다. 정부기관이므로 투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우정국에 예금하고 있는 수많은 일본 국민들이 이자율에 있어서 손해를 보고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우정국이 민영화를 통해 더 높은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이 다시 자기들에게로 돌아오길 바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관료주의에 물든 국가기관의 개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안에 반대한, 여당인데도 반대한 의원들이 있는 것은 왜일까? 고이즈미의 독단성에 대한 반발의 측면도 있지만 국가기관으로서의 우정국은 국회의원들이 손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돈이라 함부로 투자할 수 없는 우정국은 정책 사업 등에 돈을 투자하곤 한다. 그런데 해당 지역의 의원이 우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그런 돈의 흐름을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책을 위해 우정국의 돈을 갖다쓰는 것이다. 물론 그 사업이 성공한다면 좋은 수익을 올릴 수 있겠지만 일반 기업이 아닌 국가기관으로서 이윤보다는 윗사람의 압력(즉, 국회의원)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또한 수익률의 저하를 낳는 것이다.

  물론 우정국 민영화에 따른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옳은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고이즈미에 반대했던 의원들은 명분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고이즈미에게 반대하려고 했으면 다른 법안을 통해 반대했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걸린 문제에 반대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이 고이즈미 쪽으로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중의원 선거는 고이즈미의 승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우리나라 입장에선 고이즈미 총리가 싫고, 또 여러 다른 나라들의 입장에선 부시 대통령이 싫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국 내에선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선 우리는 쉽게 “일본 국민들이 우경화됐다.”느니, “미국 사람들은 바보.”라고 말한다. 이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접근은 상대국이나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결론이 횡행하는 원인 중 하나는 언론의 게으름이다. 해당 국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표면적 사실만 옮기는 데 불과한 국제 기사를 써대기 때문이다. 그런 기사라면 단신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posted by Saru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