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외롬서재/Ex Libris 2005.11.01 10:41


박이문, 『사유의 열쇠: 철학』, 산처럼
2004년 2월 10일 초판 1쇄.


<ㅉ=229>현상학 phenomenology

현상학은 20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 후설이 고안해낸 철학적 방법론이다. 이런 점에서 현상학은 같은 시기에 빈학파에 속한 몇몇 철학자들이 철학적 방법으로 고안해낸 분석철학과 논리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들을 발명한 동기가 전통적 철학관과 철학적 방법에 대한 불만과 부정 때문이라는 점에서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동일하다.

후설이 발명한 것은 '현상학'이라는 낱말이 아니라 '현상학'이라는 낱말이 붙은 철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상'이라는 개념은 이미 플라톤, 칸르의 철학에서 각자 관념적 실체(idea)와 본체(noumena)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등장했으며, '현상학'이라는 낱말은 이미 헤겔이 ≪정신 현상학≫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설의 경<ㅉ=230>우 현상은 그 두 말과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형이상학, 더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철학은 사물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물 자체가 아니라 추상적 사념에 의존했고, 과학은 이론 즉 가설과 실증적 실험이라는 두 축에 의존해서 사물에 대한 진리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으로 얻어낸 앎은 사념적 철학의 경우 처음부터 실재 즉 구체적 대상 자체를 비켜 서 있거나, 과학의 경우 논리적으로 절대적일 수 없는 감각적 실증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적 즉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짜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설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경우에만 앎이 있고, 그러한 앎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여 구체적 의식대상으로서의 '현상(phenomenon)'에 밀착해 본질 직관의 인식주체로서 노에시즈(noesis)에 의존하여 대상의 본질로서의 노에마(noema)를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을 면밀하게 전개했다. 후설의 구호는 "사물 자체로 돌아가자!"였다. 그것은 곧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경험의 대상으로 눈앞에 있는 대상 즉 현상을 냉철히 관찰, 서술, 분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분석철학과 마찬가지로 현상학은 19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역사주의와 과학주의에 함축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반발하여 '엄격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세우겠다는 동기가 뒷받침되어 있다.

<ㅉ=231>그러나 오늘날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것으로 볼 때, 20세기 초반의 철학적 경향을 지배했던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꿈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posted by Saruman
제목: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지은이: 오오누키 에미코(2003)
옮긴이: 이향철(2004)
펴낸곳: 모멘토

※ 다음은 이 책의 「옮긴이 후기」중 570~572쪽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들은 적게는 17세에서 많게는 27세에 이르는 젊은이들로 이루어져 있고 확인된 사람만 해도 연희전문학교, 경성법률전문학교, 쿄오토약학전문대학 출신 등 지적인 엘리트들이 포함되어 있다. 수기 등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도리는 없지만 특공평화회관에 붙어 있는 박동훈(朴東薰, 오오카와 마사아키 大河正明)의 앳된 영정으로부터는 스스로 특공대원으로 지원했다기보다는 식민지 출신이라는 약점을 구실로 17세의 미성년자를 강제로 귀환장치가 없는 특공기에 태워 사지로 내보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탁경현(卓庚鉉, 미츠야마 히로부미 光山博文)은 ‘특공대의 어머니’로 불리는 육군특별지정식당 토메야(富屋)의 여자주인 토리하마 토메(鳥浜トメ)와 그 딸 레이코(禮子)와 가족처럼 지내 특공대로 출격하여 전사할 때까지의 사정이 레이코의 일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20년 경상남도 사천군 서포면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부모와 여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쿄오토약학전문학교(현 쿄오토약과대학)를 졸업하고 일시 관련 분야에 취업하였으나 조선인 출신이라는 민족적 벽에 부딪혀 그만두게 된다. 그가 토메야 식당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3년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생으로 육군비행학교 치란분교장에 입교했을 때의 일이었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것을 애써 감추는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그는 처음부터 “나는 조선인입니다”라며 탁경현이라는 조선 이름을 밝혔다고 한다. 일본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는 부모님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서는 육군장교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보고 특별조종견습사관에 지원하게 되며 6개월간의 속성교육과정을 끝내고 조종사가 되어 치란을 떠나게 된다.
  그가 치란의 토메야 식당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45년 5월 초의 일이다. 당시에는 전황이 악화되어 치란에서는 특별조종견습사관 교육과정은 없어지고 특공대원들만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토메는 탁경현이 특공대원이 된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본문의 사진에서 보듯이 그는 고독하고 과묵한 청년으로 좀처럼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사후에 확인된 사실로는 그동안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과로로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연로한 아버지를 홀로 쿄오토에 두고 특공출격의 순번을 기다리기 위해 며칠간 치란에 머물렀던 것이다. 출격 전날 밤 토메야 식당에 나타난 탁경현은 평소와는 달리 “오늘밤이 마지막이니 나 조선노래 아리랑을 부르고 싶다, 불러도 됩니까”하고 양해를 구한 다음, 군복깃을 세우고 부끄러운 듯이 모자를 깊숙이 당겨 얼굴을 가린 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평소 가족만이 사용하는 안쪽 방에서 탁경현을 둘러싸고 토메와 두 딸 미야코, 레이코는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였고, 탁경현은 모자 밑으로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고 한다. 지금 토오쿄오 롯퐁기에서 ‘사츠마오고죠(薩摩おごじょ)’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레이코는 탁경현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며 “완전히 일본인이 된 것 같이 보였던 미츠야마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조국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고 싶어 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일제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50년이 더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에 다시 ‘친일’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황군으로서 “천황을 위해 일본의 사쿠라꽃으로 진” 조선인 출신 특공대원을 두둔할 생각은 손끝만큼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 들고 있는 조선인 출신 특공대원들은 17세에서 27세까지의 젊은이들로 오늘날 고등학생·대학생의 수준에서 보면 도저히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특공대원이 되어 아까운 목숨을 버렸다고 볼 수 없으며 여기에는 일본인보다도 더 복잡한 상징의 오인(메코네상스)과 그 힘이 작동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posted by Saruman
Lord of the Rings hobbit-hero Frodo Baggins knew that throughout his harrowing journey there was one who would never fail him - his loyal and ever-cheerful companion, Sam Gamgee. Even before they left their beloved hometown, Frodo warned Sam that journey would not be easy;

"It is going to be very dangerous, Sam. It is already dangerous. Most likely neither of us will come back."
  "If you don't come back, sir, then I shan't, that's certain," said Sam. "[The Elves told me] 'Don't you leave him!' Leave him! I said. I never mean to. I am going with him, if he climbs to the Moon; and if any of those Black Riders try to stop him, they'll have Sam Gamgee to reckon with." (Tolkien, The Fellowship of the Rings, p.96)

  위 글이 어디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난 어제 ‘성격 및 사회심리학 주니어 세미나’를 위해 심리학 개론서의 성격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장의 시작이 위와 같았다. 저 부분은 David G. Myers의 Exploring Psychology 6th ed.(2005)의 Chapter 12 Personality의 시작 부분이다. 저자는 Sam을 인용하면서 성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반지’에서 인용한 구절의 한국어판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봐, 샘! 이건 아주 위험한 길이야. 위험은 이미 시작됐어. 십중팔구는 우리 둘 다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샘은 딱 잘라 말했다.
  “주인님이 못 돌아오시면 저도 안 돌아옵니다. 그들은 절대로 주인님을 떠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 분을 떠나다니요?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 분이 달나라에 올라가면 나도 올라갑니다. 검은 기사들이 그 분을 붙잡으려면 먼저 나부터 처리해야 할 겁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가만히 웃기만 하더군요.)” (씨앗판 <반지원정대(상)>, 156쪽)

  내가 처음 ‘반지’를 접했을 때(94년)는 이 책이 영미권에서 이렇게 널리 알려진 책인 줄 몰랐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를 언급하지 않고 인용될 정도로-위 글의 시작은 The Lord of the rings 'by Tolkien'이 아니라 그냥 The Lord of the Rings이다.-, 그리고 출신지를 언급하지 않고 저자를 인용할 정도로-'English writer' Tolkien이 아니라 그냥 Tolkien이다.- 널리 읽히는 고전인 것이다. 예전에는 미국인이 쓴 컴퓨터 관련 서적을 보다가 URL에 대해 설명하면서 Sackville-Baggins를 갖다써서 놀란 적이 있다. http://…/shire/hobbiton/sackville-baggins 같은 식이다. (Sackville-Baggins가는 Baggins가의 친척으로 상속 등의 문제로 Baggins가와 매우 사이가 나쁘다.) ‘반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예시지만 그 저자는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이와 같은 예를 들었었다. 그 정도로 익히 알려졌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새삼 또 한 번 내가 좋아하는 ‘반지’가 인용된 책을 발견해 기쁜 마음에 이렇게 적어본다.
posted by Saruman
  한 논문에서 융은 욕정(concupiscentia)과 자부심(superbia)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발현된 리비도가 종(種)의 보존본능과 자기보존본능을 서로 연결시켜 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본능의 발현은 분명 외향성과 내향성에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성적인 관계에서 대상에게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면 그 대상에 집착하거나 의존하는 사람은 자존심이나 자부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 대상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반면 자신의 권력과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은 대상을 너무 과소평가하여 대상에 대한 집착이 전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우월성 유지라는 문제와 비교해 볼 때 다른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대상과 너무 깊은 관계를 맺어서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상실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독립성 유지라는 문제에 너무 몰두하여 대상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고, 그래서 그 대상과의 접촉이 끊어져 정서적 고립의 상아탑으로 침잠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이 양극단을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외향성과 내향성은 하나의 메커니즘 혹은 습관적인 태도일 뿐, 전혀 변경 불가능한 고정된 특징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융은 개인의 성격 유형이 어릴 적에 발달된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외향성과 내향성의 메커니즘을 적절히 활용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외향성과 내향성이 급격히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평생 조용하고 말없던 사람이 갑자기 활발하고 적극적인 외향적 인물로 바뀌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앤터니 스토 지음(1973), 이종인 옮김(1999). 시공로고스총서 <융>. 시공사. pp88-89.
posted by Saruman


개미제국의 발견 :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 이야기
최재천, 사이언스북스
1999년 1월 10일 1판 1쇄.


<ㅉ=62>개미와 말한다 : 언어의 기본구조 갖춘 지능적 의사소통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공상과학 소설 『개미』에 보면 인간이 개미들의 언어를 터득하여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현대생물학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과연 인간과 개미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올 것인가? 만일 그런 때가 온다면 무슨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크게 네 가지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들 중 청각과 촉각은 모두 진동에 의한 정보를 감지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같은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인간은 특히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동물이다. 냄새를 맡거나 몸을 더듬으며 상대를 확인하기보다는 모습을 보고 서로를 알아본다. 또 서로의 표정을 읽으며 눈치를 보기도 하고 글을 읽고 상대방의 뜻을 살피기도 한다.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인간은 말로써 대부분의 의사전달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눈과 귀와 입으로 유지되는 집단이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동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사전달 매체는 바로 다름 아닌 후각이다. 동네 개들도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냄새를 맡으며 상대의 신분을 확인한다. 말로 자기 소개를 하거나 명함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확인하는 우리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후각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인간도 알게 모르게 후각에 많은 걸 의존한다. 그렇지 않다면 향수회사들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ㅉ=63> 춤으로 말하는 꿀벌들

다른 많은 공상 과학 소설들이 그랬듯이 『개미』가 보여주고 있는 세상이 전혀 불가능하고 황당무계한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개미사회에 못지않게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꿀벌의 경우에는 우리와의 대화가 이미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현실로 다가왔다. 꿀벌들이 춤으로 그들의 의사를 전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꿀벌의 춤언어(dance language)는 행태학(ethology)이라는 학문을 정립한 선구자 중의 한 분이며 1973년 틴버겐(Niko Tinbergen), 로렌츠(Konrad Lorenz) 등과 함께 노벨 생리학 및 의학상을 공동수상한 바 있는 폰 프리슈(Karl von Frisch)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꿀이 담뿍 담긴 꽃들을 발견하고 돌아온 정탐벌(scout bee)은 이른바 꼬리춤(waggle dance)이라는 독특한 행동유형을 통해 꿀의 출처까지의 거리와 방향에 관한 정보를 전달한다. 꼬리춤을 추는 속도로 거리를 나타내고 꼬리춤을 추며 직진하는 선과 중력 간의 각도로 먹이의 방향을 나타낸다. 이같은 정보는 꼬리춤 속에 너무도 명확히 표현되어 있어서 우리 인간도 그 춤을 보고 꿀의 출처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적어도 사람의 벌의 언어를 알아듣는 단계에는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몇 년 전 독일학자들에 의해 벌들도 인간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게 되었다. 조그만 로봇을 제작하여 춤을 추게 함으로써 벌들로 하여금 미리 정해놓은 장소로 날아오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직은 일방통행이기는 하나 벌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이다. 이젠 벌들도 우리들이 그들의 언어를 터득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걸어올 일만 남은 셈이다.

개미는 냄새로 말한다.

대부분의 곤충들이 그렇듯이 개미의 언어도 기본적으로 화학언어이다. 먹이를 물고 집으로 <ㅉ=64>돌아가는 개미를 발견하면 배를 땅에 깐 채 눈높이를 최대한으로 낮추고 개미의 옆모습을 관찰해 보라. 배의 끝부분을 땅에 끌며 걸어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개미가 먹이로부터 집까지의 냄새길(chemical trail 또는 odor trail)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개미는 그렇게 냄새길을 그리며 돌아오는 길목에서나 또는 집에 돌아와서라도 다른 동료들을 만나면 우선 자기가 물고 온 먹이를 시식할 수 있게 해준다. 먹이의 맛을 보고 자극을 받은 다른 일개미들은 곧바로 냄새길을 따라 먹이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흔적이 남는다는 뜻으로 <개미도 기어간 자취는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마도 옛사람들은 이미 개미들이 냄새길을 놓는 습성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미가 냄새길을 그릴 때 사용하는 화학물질은 일종의 페로몬(pheromone)이다. 개미가 <ㅉ=65>만드는 페로몬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개미의 몸속에는 머리끝에서 배 끝까지 온갖 크고 작은 화학공장들이 있다. 그래서 개미는 마치 걸어다니는 공단과도 같다. 냄새길 페로몬은 대개 배 끝에 있는 외분비샘 중의 하나에서 만들어지는데 정확히 어느 분비샘에서 만들어진 페로몬을 사용하는지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능성이 있는 몇몇 분비샘들을 따라 해부해내어 개미집 문으로부터 각각 다른 방향으로 길게 문지른 후 개미들로 하여금 먹이를 찾아가게 해보면 어느 분비샘의 페로몬을 따라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때로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개미가 페로몬은 합성할 때 하나 이상의 외분비샘에서 생성된 물질들을 섞어 칵테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화학언어는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음성언어에 비해 훨씬 경제적이다. 잎꾼개미의 냄새길 페로몬은 독침샘에서 분비되며 화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본 화학구조가 methyl-4-methyl-pyrrole-2-carboxylate로 밝혀졌는데 외워두었다가 다른 이들에게 한번쯤 들려주며 은근히 뽐낼 만한 명칭이다. 그런데 이 화학물질은 얼마나 민감하지 1㎎만으로도 지구를 세 바퀴나 돌 만큼 긴 냄새길을 만들 수 있다. 냄새길 페로몬은 또 대단히 휘발성이 강한데 그 또한 경제적이다. 먹이를 다 거둬들이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냄새길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많은 일개미들이 아직도 먹이가 남아있는 줄 알고 헛걸음을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먹이를 물고 돌아오는 개미만이 이미 한 쪽에선 희미해지기 시작한 냄새길 위에 페로몬을 더 뿌려 길의 모습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 먹이가 없이 빈 입으로 돌아오는 개미는 더 이상 페로몬을 뿌리지 않음으로써 냄새길은 자연스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경보도 화학 사이렌으로

자기의 터나 집 안에 침입자가 나타났을 경우 개미들은 화학 경보를 울린다. 필자가 파나마의 바로콜로라도 섬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열대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시절에 관찰한 일이다. 중남미의 열대림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아즈텍개미 중 몇몇 종들은 큰 나뭇가지에 어른 키만큼이나 길게 집을 지어 매달고 산다. 그런데 이들은 어찌나 사나운지 그 나무 주변에서 잠시만 머뭇거려도 어느 새 몇십 마리나 되는 일개미들이 둘러붙어 온몸을 물어뜯는다.

침입자를 발견하면 즉시 경보 페로몬(alarm pheromone)을 분비한다. 순식간에 수많은 동료 일개미들이 사건 현장으로 집결하여 침입자를 완전히 포위한 후 다리와 더듬이를 겨냥하여 공격을 시작한다. 그리 오래지 않아 침입자는 사극 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극형인 능지처참을 당한다. 세 쌍의 다리들과 한 쌍의 더듬이 모두가 팔방으로 찢기는 참사를 면치 못한다.

<ㅉ=66>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호주의 열대림에 서식하는 베짜기개미(weaver ants)의 화학언어는 휠도블러와 윌슨 박사의 오랜 공동 연구에 의해 매우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베짜기개미들은 여럿이 힘을 합해 한 가지에 달려 있는 여러 나뭇잎들을 끌어당긴 후 애벌레들이 분비하는 명주실을 사용하여 바느질하듯 잎들을 엮어 살 집을 만든다. 이처럼 미성년자들까지 동원한 조직적인 협동사회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또한 고도로 발달된 화학언어이다. 터의 경계를 표시하는 일이나 먹이가 있는 곳 또는 침입자를 발견한 곳 등을 알리는 일 모두를 불과 몇 가지의 간단한 화학단어들을 가지고 표현한다. 그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여러 종류의 문구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전유물로만 생각하기 쉬운 언어의 기본적인 구조를 갖춘 의사소통 수단이다.

몸짓 발짓에 소리까지

개미의 언어가 기본적으로 후각에 의존한 화학언어이기는 하지만 청각과 촉각도 그들의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최근 20여 년간 개미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로 상당히 많은 종의 개미들이 소리를 내어 의사를 전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리를 이용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곤충으로는 귀뚜라미, 베짱이, 매미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개미는 그들과는 달리 우리 귀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종류의 소리를 낸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개미도 노래를 하는데 다만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개미들 중 비교적 원시적인 종일수록 몸짓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먹이를 발견한 곳으로 동료들을 동원할 때 한번에 한 명씩밖에 데려가지 못한다. 일단 동료 일개미를 만나면 더듬이로 몇 번 그 동료를 두드린 다음 돌아서서 먼저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그러면 동료 일개미는 앞서가는 개미의 몸에 자기의 몸을 거의 기대듯 바짝 <ㅉ=67>뒤를 쫓는다. 때론 뒤따라가던 개미가 앞서가는 개미를 놓치기도 한다. 앞서가던 개미는 뒤따라오는 동료의 더듬이가 더 이상 자기 몸을 건드리지 않으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동료를 찾는다. 동료가 잘 따라오지 않을 때는 입으로 물며 끌어당기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병렬주행(tandem running)이라 부르는데 어떻게 이런 비효율적인 의사소통 방법으로부터 냄새길을 놓아 한꺼번에 여러 동료들을 동원할 수 있는 이른바 대중전달수단(mass communication)이 진화되었는가는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ㅉ=94>희생정신 충만한 아마존 왕국 : 자식도 포기하고 여왕 위해 봉사한다.


개미사회는 흔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맹스런 아마존에 비유된다. 이는 그 사회가 짧은 번식기 동안을 제외하곤 순전히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이기 때문이다. 최고 통치자도 여왕이고 집안일에서 바깥일에 이르기까지 그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맡아 하는 일꾼들도 전부 여자들이다. 수개미들은 번식기에만 태어나 바람 없고 따뜻한 어느 날 모두 집을 떠나 다른 집 규수들을 만나서 짤막한 정사를 가진 다음 서둘러 세상을 떠나는 사뭇 덧없는 삶을 산다.

개미사회는 또 여왕을 중심으로 이룩된 하나의 국가로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사회는 나라라기보다는 가족이다. 남이 집으로 납치되어 노예가 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모든 일개미들은 다 한 여왕의 몸에서 태어난 딸들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가 딸만 많이 낳아 같이 사는 딸부잣집인 셈이다. 아들은 가끔 낳아 출가외인을 만들고 딸들만 데리고 살림을 꾸린다. 아들들은 태어나서 집에 있는 동안 빗자루 한번 드는 법도 없고 사냥 한번 다녀오는 일도 없이 오로지 장가갈 날만 기다린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영락없는 놈팽이들이다.

그러나 딸들은 다르다. 평생을 시집도 가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모신다. 물론 딸들 중에는 번식기에 집을 떠나 수개미들과 교미비행을 마친 뒤 새로운 살림을 차리게 되는 차세대의 여왕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딸들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온 힘을 다하여 어머니를 위해 또 집안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일개미들은 갓 태어나 어렸을 때는 여왕의 시<ㅉ=95>중을 드는 일부터 시작하여 조금 크면 알이나 애벌레들을 돌보는 등 집안일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밖에 나가 먹이를 구해 오거나 집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된다.

일개미들의 숭고한 자기희생

이렇듯 일을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바치는 것 외에 유별난 희생을 감수하는 일개미들을 몇몇 소개해 보고자 한다. 미국 남서부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지대에 사는 꿀단지개미(honeypot ants)들은 사냥도 하지만 진디 같은 곤충들을 보호해 주고 대가로 얻는 꿀을 모아 저장해 두었다가 양식이 부족한 철에 꺼내 먹는다. 그런데 그들이 꿀을 담아 놓는 단지가 묘하다. 일개미들 중 몸집이 큰 것들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동료들이 먹여주는 꿀을 있는 대로 받아 뱃속에 저장하는 것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이 살아있는 꿀단지들은 부풀 대로 부풀어 천근만근 무거운 몸도 마다하지 않고 동료들을 위해 헌신한다.

큰 나무에 구멍을 뚫고 사는 거북이개미(turtle ants)나 유럽의 목수개미(carpenter ants) 중에는 구조 자체가 변화된 머리로 집의 현관문을 막고 보초를 서는 일개미들이 있다. 바깥일을 보고 돌아온 동료가 더듬이로 머리를 두드리면 비켜서서 들어오게 하지만 다른 집안의 개미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일부(一夫)가 지키는 관문을 만부(萬夫)가 열지 못하더라>는 이백(李白)의 시처럼 지키는 개미는 하나지만 만 마리의 개미들이 공격해도 열리지 않는 철옹성이다. 일개미 한 마리가 혼자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굴은 여러 마리의 일개미들이 머리를 모아 지키기도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꼼짝 않고 문을 지키는 그들의 봉사정신은 정말 대단하다.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희생을 얘기할 때 우리는 종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단 자기 비행기가 저격을 받으면 미국 항공모함에 자기 몸과 비행체를 송두리째 던져버린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를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기꺼이 바쳤던 그들이다. 대부분<ㅉ=96>의 개미사회의 일개미들은 모두 가미카제가 될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인상적인 것은 말레이시아의 열대림 속에 사는 목수개미이다. 이 종의 일개미들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폭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몸은 턱에서부터 배 끝까지 이어지는 한 쌍의 긴 분비샘으로 꽉 차 있는데 다른 개미들과 전투를 벌이거나 포식동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스스로 자기 배를 터뜨려 분비샘에 들어 있던 끈끈한 독물을 적에게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죽고 만다.

꿀벌에 쏘인 경험이 있는 이들 중에는 혹시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 집을 위협하는 다른 동물들에게 침을 쏠 때 독소만 주사하는 것이 아니다. 독소를 만드는 내장기관 전부를 그 동물의 몸에 꽂아 놓고 날아간다. 그리고 자신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면 죽고 만다. 이렇게 적의 몸에 꽂힌 독침기관은 몸에서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근육운동에 의해 계속 독소를 적의 몸속으로 쏟아 붓는다. 또 반대편으로는 독소를 공기 중으로 증발시킴으로서 자기 동료들에게 적의 존재를 알려 순식간에 수많은 일벌들이 달려나와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한다.

몇 년 전부터 미국은 중남미 열대지방으로부터 북상해 오고 있는 살인꿀벌(killer bees)에 대한 두려움에 웅웅거리고 있다. 실제로 살인꿀벌에 쏘여 죽은 사람들의 수가 엄청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사건의 잔혹함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필자도 1985년 여름 코스타리카의 팔로베르데(Palo Verde)라는 지방에 머물 때 홍콩에서 마이애미 대학으로 유학하고 있던 대학원생이 살인꿀벌에 죽임을 당한 일을 기억한다. 산에 오르다 발을 헛디뎌 바위 틈새에 있던 살인꿀벌의 둥지를 건드린 것이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그는 바위틈에 꽉 낀 발을 뺄 수 없었고 몇 번에 걸친 동료들의 구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애끓는 비명소리와 함께 죽어갔다.

살인꿀벌은 사실 일반 꿀벌과 유전적으로 거의 다를 바 없는 같은 종이다. 다만 자기 군락을 지키려는 의지가 훨씬 더 강한 종류일 뿐이다. 그들은 일반 꿀벌보다 민감하게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신경질적인 벌들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더욱 확고하게 갖춰진 벌들이라는 얘기다. 그들의 신경질적인 습성 덕분에 그들은 다른 일반 꿀벌들보다 많은 꿀을 생산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전 아프리카<ㅉ=97>로부터 브라질로 옮겨졌고 그 후 점차 그들의 세력권을 확대해 급기야는 미국에까지 이른 것이다.

자식도 없이 평생토록 일만

일벌이나 일개미의 희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식을 낳는 걸 포기하고 여왕을 도와 그로 하여금 집안의 모든 번식을 담당하게 한다.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진화의 기본개념에 비춰보면 이같은 번식희생만큼 궁극적인 희생도 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진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사회에서 어떻게 이같은 이타주의적인 개체들이 생겨난 것일까?

자연 선택설을 제안하여 진화현상을 설명한 다윈(Charles Darwin)에게도 두 가지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왜 암수가 모두 한 종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에서 수컷들만 유독 화려한 특성을 지니는가 하는 의문이고 또 하나는 어떻게 일개미와 일벌들의 희생정신이 진화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두 문제는 모두 생물은 누구나 보다 많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그의 이론에 위배되는 현상들이었다. 벌, 개미, 그리고 흰개미 등을 우리는 흔히 사회성 곤충이라 부른다.

그들은 모두 일벌이나 일개미들의 희생정신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사회를 구성하고 살기 때문이다. 이들 중 흰개미를 제외한 벌과 개미들은 모두 벌목(Hymenoptera)이라는 분류군에 속하는 곤충들이다. 그런데 벌목 곤충들은 대단히 묘한 방식으로 아들딸을 구별하여 낳는다. 여왕벌이나 여왕개미가 번식기에 수컷들과 교미하여 받은 정자를 몸속의 저정낭에 보관하고 있다가 알을 낳을 때 저정낭으로부터 정자를 꺼내어 수정을 시키면 암컷이 되고 저정낭을 막아 미수정란을 낳으면 수컷이 된다. 다시 말해서 벌이나 개미사회의 수컷들은 동정녀로부터 태어난 개체들이다.

인간을 위시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세포 속에 두 벌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이른바 이배체동물들이다. 그러다 정자나 난자를 만들 때는 한 벌로 줄였다가 그들이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면 다시 두 벌의 염색체를 지닌 이배체동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수벌이나 수<ㅉ=98>개미는 정자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난자로부터 만들어지는 반수체 동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세포 속에는 언제나 단 한 벌의 염색체만 들어 있다. 따라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수벌이나 수개미는 아버지가 없는 개체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있으나 아버지나 친할아버지는 없는 묘한 존재들이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오늘날 이 지구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는 동물들은 모두 고도로 발달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이른바 사회성 동물들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서로 협동함으로써 다른 종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이 같이 엄청난 힘을 얻게 되는 과정 속에는 언제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갈등이 존재한다. 똑같은 암컷으로 태어나 왜 누구는 여왕이 되고 누구는 일개미가 되어야 하는가? 언뜻 보면 일개미로 태어난 암컷들에게 무척이나 불공평한 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거동이 불가능하도록 비대해진 몸으로 일개미들이 떠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평생 알만 낳는 여왕개미를 볼 때마다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 사회인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 야사에 보면 양반집 씨받이 여인들은 문 밖 출입도 잘 못하고 비대해진 몸으로 아이를 낳는 일에만 전념했다는 뒷얘기도 있는데 자못 흥미로운 비교가 아닐 수 없다.


<ㅉ=99>이방원과 정도전 : 강력한 왕권이냐 민중의 뜻이냐


개미사회를 관찰하다 보면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작가 오웰(George Orwell)의 또 다른 소설 『1984』가 생각난다. 숨막히게 조직적인 구조 속에서 제가끔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는 사회. 인간사회에선 소설로나 가능한 것이 개미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현실로 나타난다. 자기군락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고 어머니인 여왕으로 하여금 군락내의 모든 번식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극도의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이룩된 사회. 이처럼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이타적인 희생이 관점을 달리하여 유전자의 수준에서 분석해보면 결국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의 관점

우리는 과연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 얼마나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가 말이다. 어머니와 자식간의 유전적 연관관계는 정확하게 50%이다. 어머니가 난자를 만들 때 당신이 가지고 있던 두 벌의 염색체중 한 벌만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50%이다. 난자와 정자 같은 생식세포들은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체세포들과는 달리 염색체의 수가 반으로 줄어드는 이른바 감수분열을 통해 만들어진다.

<ㅉ=100>형제간의 유전적 연관관계는 어떤가?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형제자매들은 평균적으로 50%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형과 아우가 모두 우연하게도 똑같은 유전자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 경우도 있지만 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아우는 어머니로부터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든 유전자를 통털어 평균을 내보면 그 연관계수가 50%인 것이다. 형하고는 기가 막히게 잘 통하는데 왠지 누이와는 뭔가 껄끄러워 늘 토닥거리며 자란 경험이 있다면 혹시 누이와 내가 어머니, 아버지의 서로 다른 유전자들을 평균 이상으로 전해 받은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촌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유전적 연관계수는 그 만큼 낮아진다. 일찍이 영국의 유전학자 헐데인(J. B. S. Haldane)은 그가 잘 가던 케임브리지 대학 앞 어느 술집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내가 만일 형제 둘 이상이나 사촌 여덟 이상을 구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다.> 우린 사촌이라 하지만 실제로 사촌간의 유전적 연관관계를 따져보면 평균적으로 8분의1이 된다. 나와 삼촌 또는 이모와의 관계가 4분의1이다.

그러니 벌과 개미 등 이른바 벌목에 속하는 곤충들은 그들의 독특한 반수이배체식 성결정 기작 때문에 유전적 연관관계도 독특하다. 1964년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처음으로 제공한 영국의 생물학자 월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계산에 의하면 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딸들인 일개미들 또는 차세대 여왕개미들 간의 유전적 연관계수는 이배체동물의 50%보다 훨씬 높은 75%이다. 자세한 계산방법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같이 높은 계수는 일개미들의 아버지인 수개미가 정자를 만들 때 자신이 갖고 있던 한 벌뿐인 염색체를 몽땅 건네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개미들은 딸들에게 자기들이 갖고 있던 유전자의 전부를 제공하는 것이다. 얼굴도 못 본 딸들을 위해 <ㅉ=101>모든 걸 바치고 죽어간 수개미들은 자기 딸들과 100%의 연관관계를 갖는 셈이다.

일개미들간의 75%라는 연관계수는 일개미 자신이 직접 자식을 낳아 기르더라도 그 자식과의 연관계수가 고작 50%인 점에 비춰볼 때 대단히 높은 수치이다. 그래서 해밀턴은 우리에게 이 문제를 개체의 수준에서 보지 말고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라고 말한다. 후세에 보다 많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생존경쟁을 하는 것이 진화라면 일개미로서는 친 자식을 낳아도 자신의 유전자의 50% 밖에 얻지 못하지만 어머니인 여왕을 도와 누이동생을 얻으면 자신의 유전자의 75%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개미들은 스스로 번식하길 포기하고 평생을 여왕을 위해 일하는 이타주의자들로 진화한 것이라고 해밀턴은 설명한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생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책 『이기적인 유전자The Selfish Gene』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시중 책방에 나와 있다. 그 책의 요지는 한 마디로 진화의 단위는 개체가 아닌 유전자라는 것이다. 개체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가지만 유전자는 번식을 통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Wilson) 교수는 새뮤얼 버틀러의 말을 빌어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매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일개미들의 역적모의

개미나 벌들의 사회를 초개체라 부르는 이유도 그 구성원들이 제가끔 자기 맡은 바를 일사분란하게 수행하고 서로 협동하는 모습이 마치 한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지니며 한 개체로 행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일개미들의 보호와 부양을 받으며 알을 낳는 일만하고 일개미들은 그런 여왕이 오로지 알 낳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군락일들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효율을 극대화하는 분업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일개미들이 『1984』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처럼 자기 의사도 전혀 없는 기계적인 개체들만은 아니다. 그들도 엄연히 독립적인 몸을 가지고 개별적인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들이다. 흔히 여왕개미만이 알을 낳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다른 상황에서 실제로 일개미들이 알을 낳는 경우도 상당수 관찰되었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일개미들이 알을 낳는 경우를 보고한 연구 논문들을 모두 수집하여 종합논문을 발<ㅉ=102>표한 적이 있다. 그 논문에 의하면 일개미들이 알을 낳는 경우는 뜻밖에도 퍽 빈번하며 그 전략도 매우 다양하다.

일개미들이 낳는 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애벌레로 부화되지 않고 군락의 다른 구성원들의 먹이로 쓰이는 이른바 영양란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적으로 부화하는 생식란이다. 그러나 군락 내에서 수개미와 교미할 기회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개미가 낳을 수 있는 알은 생식란이라 할지라도 결국 미수정란이므로 모두 수개미로 성장한다. 많은 종에서 여왕개미가 죽고 나면 그동안 여왕물질의 영향으로 생식 능력이 억제되어 있던 일개미들이 알을 낳기 시작한다. 그러나 몇몇 종에서는 여왕이 살아있는 군락에서도 일개미들이 알을 낳아 정상적으로 수개미들을 기르기도 한다. 일개미가 낳은 미수정란이 수개미가 아니라 일개미로 태어나는 현상이 프랑스와 일본의 개미학자들에 의해 최소한 두 종의 개미에서 밝혀졌다. 미수정란에서 수놈이 태어나는 것이 법칙인 반수이배체 성결정 기작에 어긋나는 진기한 현상이다.

여왕이 버젓이 살아있는 동안 일개미들이 수개미를 기르는 일이 언제나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종에서는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며 여왕과 일개미들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수개미들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일개미들이 생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종에서는 여왕개미와 일개미들간의 갈등은 끊일 날이 없다. 일개미들은 대체로 여왕물질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군락의 변방에서나 또는 굴속 어느 한방의 입구를 막은 채 여왕의 눈을 피해 자기들끼리 알을 낳는다. <왕은 긴 팔을 가졌다>는 서양속담이 있지만 여왕개미의 팔이 한없이 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때로 여왕개미가 일개미들의 역적모의를 눈치채게 되면 손수 역도들의 소굴로 행차하여 그들을 가차없이 물어 죽이는 일도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개미군락에서는 일개미들이 아무<ㅉ=103>런 지각도 없이 그저 전체의 복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엄한 군주의 압제 하에서도 틈틈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지독한 전체주의 사회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일개미들과 그를 견제하는 여왕개미 모두가 결국 독립적인 생명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애니메이션 영화 「개미(Antz)」의 주인공처럼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 자신의 권익에 대해 고민하는 사뭇 개성적인 일개미도 상상해 볼 만하다.

사회적 갈등과 왕권 강화

여왕개미에게는 일개미나 수개미나 모두 동일하게 소중하다. 알을 정자와 수정시켜 낳으나 미수정란으로 낳으나 자신의 유전자의 반을 주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이 소중하다. 다만 집안일을 돕지도 않는 수개미부터 만들어서는 집안 꼴이 말이 아닐 뿐이다. 수개미와 여왕개미가 차세대의 번식을 맡을 생식세포라면 일개미들은 그런 생식세포들을 만들 수 있도록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체세포들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때까지 우선 몸의 여러 기관들이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일개미란 수개미와 여왕개미를 만들기 위해 투자하는 성장과정이다. 따라서 여왕개미로서는 자기 군락이 수개미나 여왕개미를 생산할 수 있을 규모의 경제구조를 갖춘 후에는 아들 딸 구별 않고 고루 낳아 기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개미들의 속셈은 다르다. 앞에서 밝힌 대로 일개미들간의 유전적 연관계수는 75%이지만 일개미와 수개미의 연관계수는 25%밖에 되지 않는다. 이배체동물의 경우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남매는 평균적으로 50%의 유전자를 공유하지만 개미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겐 아무 유전자도 주지 않으므로 일개미의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만 같은 남자형제이기 때문에 25%의 유전자 밖에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개미들은 어머니인 여왕개미의 의도와는 달리 수개미보다는 같은 일개미나 차세대 여왕개미를 선호하는 것이다. 물론 알을 낳는 것은 여왕이지만 키우는 것은 일개미들이다. 아무리 막강한 절대군주라도 신하들의 도움 없이는 국사를 제대로 치룰 수 없는 법이다. 마치 조선 초기 이방원과 정도전간에 벌어졌던 정치이념의 대결을 방불케 한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여왕개미와 일개미들간의 권력의 줄다리기는 누구의 승리로 돌아갔을까? 대부분의 개미학자들은 이방원의 손을 들어준다. 물론 여왕개미와 일개미의 몸집이 그리 다르지 않은 종들도 있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여왕개미는 일개미에 비해 가슴이 더 두툼하고 날개가 달렸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왕개미와 일개미간에 크기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는 사실 드문 편이고 대부분의 종에서는 여왕개미가 일개미에 비해 비<ㅉ=104>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그만큼 힘도 더 셀 것이고 자연히 지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췄을 것이다.

여왕개미가 분비하는 화학물질로 일개미들의 생식활동을 억제하고 군락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이른바 여왕물질이 왕권강화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본보기이다. 전혀 다른 종의 애벌레들을 훔쳐다가 키우며 그들이 알에서 깨어날 때 여왕물질을 발라주면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친 어머니로 알고 평생토록 충성을 다하는 노예개미. 여왕물질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부분의 종에서 여왕물질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라야 일개미들이 알을 낳을 수 있는가도 간접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보다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개미의 수를 늘여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만큼 많은 정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수컷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자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여왕개미들은 대체로 혼인비행 때 많은 수개미들과 정사를 벌여 평생토록 쓸 수 있게 충분한 수의 정자를 비축한다. 여러 남정네와 정사를 갖는다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라도 군락의 질서에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을 경우에라야 일개미들간의 유전적 연관계수가 75%가 되는 것이지 서로 다른 아버지를 가진 이른바 배다른 일개미들간의 연관계수는 많은 경우 50%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여왕을 도와 더 많은 누이동생을 기르는 것보다 자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유리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배다른 일개미들이 제가끔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걸보면 개미의 역사에서는 왕권주의가 점차적으로 자리매김을 했음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역사에도 아마 이방원과 같은 잔인하고도 단호한 군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ㅉ=119>전쟁과 노예 : 대량학살에서 무혈전쟁까지


아군의 목이 또 하나 잘려 땅바닥에 나뒹군다. 종일토록 벌린 긴 전투에 병력 손실이 적지 않다. 아군 하나마다 두세 명의 적이 덤벼들고 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을 당할 길이 없다. 지원군을 불러들이기 위해 발 빠른 병사 몇몇이 후방으로 향한다.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이 장면은 실제로 개미사회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모습이다. 인간의 전쟁에서처럼 <돌격> 또는 <작전상 후퇴>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진두지휘를 하는 사령관개미가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적의 병력을 파악하여 증원이 필요할 때는 신속히 집으로 돌아가 알리는 이른바 연락병개미가 있다는 사실은 관찰되었다. 미국 애리조나의 사막지대에 사는 꿀단지개미(honeypot ants)의 전쟁을 십수 년에 걸쳐 연구해 온 필자의 스승 휠도블러 박사에 의해 발견된 현상이다.

적의 병력 파악하여 적절한 전략 세운다

우리와 같이 수의 개념을 지닌 것도 아닌 작은 개미들이 과연 어떻게 적의 병력을 가늠할 수 있을까? 적군의 수를 세어 아군의 병력에 견주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사람의 경우 수의 개념은 대개 7세를 전후하여 얻는다고 한다. 동물들에게도 과연 수의 개념이 존재하는 가하는 실험들은 주로 새, 쥐, 그리고 원숭이들에게 행해졌다. 까마귀와 앵무새가 특정한 수와 물<ㅉ=120>체를 연관시키는 실험들은 오래전부터 실시되었다. 세바라는 이름의 침팬지는 간단한 한 자리수의 덧셈까지 할 수 있음이 관찰되었다. 개미의 경우 수를 직접 셀 수 있는 것은 아닌 듯싶고 아마도 적의 병력과 아군의 병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비교할 수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구에 의하면 줄잡아 세 가지 방법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적군과 아군이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전장에서 누구와 더 자주 부딪치는가로 가늠하는 방법이다. 동료를 더 자주 대한다면 모르나 적과 더 자주 맞부닥치게 된다면 후퇴할 채비를 차려야 할 것이다. 몸집이 다른 일개미 체급을 가지고 있는 종들 간에 전투가 벌어질 경우 대형 일개미의 빈도로 적의 병력을 측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형 일개미는 군락의 규모가 어느 수준 이상이 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소형 일개미들 외에도 상당수의 대형 일개미들을 전장에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은 그 군락이 상당한 규모에 이름을 의미한다. 세 번째 방법은 전장에는 출두했으나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고 있는 병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휠도블러 박사에 의하면 꿀단지개미는 위의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고 한다.

동물들 중에도 피를 흘리며 물고 뜯는 무서운 맹수들이 있지만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ㅉ=121>경우는 드물다. 인간처럼 대량학살도 불사하는 동물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을 제외하고 동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혈전쟁에 대량학살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은 벌과 개미들뿐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고도로 발달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동물들이다. 아마도 종족살상과 대량학살은 사회성에 따라오는 필요악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개미들 간의 전쟁이 모두 피비린내 나는 유혈전만은 아니다. 전통적인 의식을 통해 서로의 힘을 가늠하여 피를 그다지 많이 흘리지 않고 비교적 평화적으로 전투를 끝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꿀단지개미가 그 좋은 예다. 마치 뉴기니 섬에서 수렵생활을 하는 마링족(Maring tribe)의 의례적인 무혈전쟁을 방불케 한다. 전통적인 차림을 하고 영토의 변방에 일렬횡대로 길게 늘어서서 춤도 추고 큰 소리로 고함도 지르고 서로의 위용을 과시하는 의식이 고작이다. 그래도 끝이 나지 않으면 그제서야 활을 꺼내 쏘기 시작하는데 어느 편이건 한사람이라도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면 그것으로 싸움도 끝이 난다. 전면전은 좀처럼 벌이지 않는다.

종족말살보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꿀단지개미들이 좀처럼 유혈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의 싸움이 대부분 경제 전략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사막지대에 사는 그들에게 좋은 먹이는 여기저기에서 불규칙적으로 나타난다. 일단 장시간에 걸쳐 수확해 들여야 할 먹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단지개미들은 이웃군락과의 접경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그 군락으로 하여금 힘겨루기 토너먼트에 여념이 없게 만들고 그 틈에 먹이를 죄다 집으로 수확해 들인다. 겉으로는 전쟁을 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실속 있게 경제를 챙기는 것이다.

이렇듯 기가 막힌 전략을 사용하는 꿀단지개미에게도 만만찮은 적수가 있다. 꿀단지개미의 이웃에 사는 코노머마개미(Conomyrma bicolor)가 좋은 먹이를 먼저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즉시 군대를 풀어 꿀단지개미의 굴을 포위한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작은 돌들을 물어 굴속으로 계속 떨어뜨린다. 갑자기 산사태를 만난 꿀단지개미들은 끊임없이 굴러드는 돌들을 치우기에 여념이 없고 그동안 다른 코노머마 일개미들은 먹이를 죄다 수확해 들인다. 실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격이다.

다분히 경제적인 이유로 전쟁을 하는 개미들은 이념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극렬한 전쟁을 벌이는 우리인간과는 무척 다르다. 경제적인 문제도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지만 그런 전쟁은 믿음이 다른 종족간의 전쟁에 비하면 그 잔인한 정도가 다르<ㅉ=122>다. 히틀러의 나치군이 일으켰던 세계대전이나 최근에 있었던 보스니아나 르완다의 전쟁 등에서 보듯이 인간은 때로 상대종족의 씨를 말살하기 위하여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의 특성 중 아직 동물세계에서 관찰되지 않은 것이 바로 종교인데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개미는 인간 외에 노예를 부리는 유일한 동물

개미들이 전쟁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꿀단지개미의 경우 전통적인 토너먼트 의식을 통해 상대군락이 엄청나게 약세임을 파악하면 급기야는 상대의 굴속까지 밀고 들어가 여왕개미를 죽인 후 어린 일개미들과 유충들을 납치해다 노예로 삼는다. 그런데 꿀단지개미의 경우처럼 같은 종 내에서 노예를 만드는 일은 사실상 드물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른 종의 개미들의 유충들을 납치해 와 노예로 삼는다. 인간사회에 비유하면 전자의 경우는 노예제도라 할 것이나 후자는 사실 인간이 소나 말을 가축으로 삼은 것과 <ㅉ=123>흡사하다.

노예잡이개미로 가장 잘 알려진 아마존개미(Polyergus)가 노예를 포획하러 다른 개미의 굴로 돌진하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다. 약탈 대상군락을 정하고 나면 우선 정탐개미 몇 마리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면 만들어 놓은 냄새길을 따라 좌우살핌도 없이 전속력으로 적의 굴을 향해 돌진한다. 여러 줄로 어깨를 나란히 한 개미들이 매초 3cm의 속도로 달려간다. 개미의 크기를 사람의 몸집으로 환산하여 추정하면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줄을 지어 시속 26km로 행군하는 셈이다.

종에 따라 다르지만 아마존개미는 앞장을 선 정탐개미들을 뒤따르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려놓은 냄새길을 따라 쳐들어간다. 눈앞에 나타나는 적군을 가차 없이 물어 죽이며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번데기들을 <ㅉ=124>물고 돌아온다. 이렇게 남의 군락으로 옮겨진 유충들은 새 여왕이 분비하는 화학물질에 세뇌를 받으며 성장하여 같은 종도 아닌 남의 군락을 위해 평생 죽도록 일만 한다. 일단 노예를 확보한 노예잡이 군락의 일개미들은 이를테면 채찍을 들고 노예만 부릴 뿐 별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다. 실험적으로 노예들을 모두 제거해버리면 마지 못하는 듯 군락의 모든 일을 하다가도 다시 노예들을 넣어주면 금세 일손을 놓고 노예들을 부리기 시작한다.

노예잡이 개미들 중에는 아마존개미처럼 닥치는 대로 적군을 학살하며 무력으로 노예들을 약탈해오는 종들이 대부분이나 피를 흘리지 않고도 쉽게 노예를 확보하는 종도 있다. 포미카 서브인테그라(Formica subintegra) 일개미들은 배의 반 이상이 두포어샘(Dufour's gland)이라는 분비샘으로 가득 차 있는데 남의 군락을 습격할 때 이 분비샘으로부터 일종의 <불온선전> 화학물질을 내뿜어 대혼란을 일으키곤 그 틈에 노예로 만들 번데기들을 납치한다. 에피머마개미(Epimyrma)의 경우에는 혼인비행을 마친 젊은 여왕이 몸소 가슴개미(Leptothorax)의 굴로 잠입해 여왕을 죽이고 버젓이 옥좌를 차지하기도 한다.

우리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

개미들의 전쟁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필자의 연구진도 벚꽃이 한창인 따뜻한 봄날 바로 실험실 건물 옆 벚나무 아래에서 장장 며칠에 걸쳐 벌어진 일본왕개미의 전쟁을 관찰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들에게도 역시 전투에 투입된 병사의 수가 중요한 것 같았다. 한 일개미가 적을 일대일로 마주하고 춤을 추듯 견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의 더듬이나 다리를 물어 행동을 <ㅉ=125>부자유스럽게 만들면 다른 일개미가 옆에서 적의 목이나 허리를 물어 끊는다. 꿀단지개미의 경우처럼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간파하고 후방으로 병력을 보강하려 달려가는 연락병개미들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전장에 투입된 병사의 수가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장기간에 걸친 전투로 부상자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일개미는 허리 밑이 완전히 잘려 나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적의 머리가 아직도 더듬이에 매달린 채 계속 상대편 병사와 대치하고 있는 일개미도 있었다. 그 일개미의 더듬이에 매달린 머리는 동료로 하여금 측면공격을 하도록 상대의 더듬이를 물고 늘어지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한 어느 불행한 병사의 죽음이렷다.


<ㅉ=128>알면 사랑한다


개미의 한문표기인 의(蟻)는 옳을 의(義)자에 벌레 충(虫)부를 붙인 글자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는 의로운 벌레라는 뜻이다. 중국 사람들은 아마도 그 옛날에 이미 개미들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미는 사실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동물이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된 멋진 사진들도 잘 보면 개미 자체가 화려한 것은 아니라 그 주변이 더 멋진 것들이다. 그런 개미들의 이야기를 사진을 중심으로 하여 책을 만드는 일은 마치 주연보다 더 화려한 조연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는 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미의 매력은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인간을 뺨칠 정도로 조직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있다. 언뜻 보아 우리보다 훨씬 더 전체주의적인 정치사상을 지닌 그들이지만 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한편으로는 개인의 권익을 중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동물이다. 인류의 역사가 고작 4백만 년 정도인데 비해 개미는 적어도 약 8천만년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그들의 체계를 실험 해왔다. 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 찾는다면 그 역사가 불과 2백년 남짓이라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실험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념이 인간사회에서는 실패했으나 개미사회에서는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가.

인간은 스스로를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다. 만일 어느 이름모를 행성의 생물학자들이 지구에 살고 있는 동물들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러 왔다고 가정해보자. 하늘을 찌를 <ㅉ=129>듯 솟아있는 마천루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거미줄 같은 도로망들, 온갖 농작물들을 기르기 위해 일구어 놓은 크고 작은 농지 등을 바라보며 주변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며 적응해가는 지구 동물들의 생태를 흥미롭게 기록할 것이다. 더욱이 그 모든 것들이 다 인간이라는 단 한 종의 동물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적지 않게 놀랄 것이다. 이렇듯 현대 기계문명사회의 주인은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광활한 자연생태계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곤충들이다.

개미는 비록 사람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몸집을 갖고 있지만 이 지구생태계를 지배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개미를 비롯한 이른바 사회성곤충들의 생태적 성공은 실로 경이로운 수준이다. 아주 높은 고산지대와 극지방 그리고 물 속을 제외하곤 개미가 살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들이 사는 집안이나 보행자들이 물밀듯 밀려다니는 뉴욕이나 서울같은 대도시의 보도위에서도 우린 흔히 개미를 발견한다.

1970년대 중반 독일의 생태학자들이 남미의 아마존지역 열대림 내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들을 거대한 저울에 올려 그 무게를 쟀다고 가정하고 표본 추출한 방법을 통해 그들의 생물중량을 측정한 일이 있다. 놀랍게도 개체 수준에서 비교하면 우리 인간의 백만분의 일도 채 안되는 개미와 흰개미들이 전체 동물중량의 3분의1을 차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각 개체로 보면 정말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워낙 수적으로 성공한 동물들이라 다 모아 놓으면 표범이나 맥 같은 큰 짐승들보다도 우점종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곤충은 줄잡아 75만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개미는 약 9천5백 종이고 벌이나 흰개미 등 이른바 사회성곤충을 통틀어 보면 1만3천5백 종에 달한다. 이는 전체 곤충종속의 겨우 2% 정도에 불과하지만 생물중량으로 따져보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곤충군이다. 영국의 어느 곤충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상에 사는 총곤충의 수는 줄잡아 10만조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개미를 전체의 약 1%로만 잡아도 그 수는 무려 1만조에 이른다. 일개미 한 마리의 체중을 대략 1-5밀리그램으로 계산해보면 전 세계에 분포하는 개미의 무게는 인류 집단전체의 무게와 엇비슷해진다.

인류와 맞먹는 생물중량을 가진 그들이지만 워낙 작은 개체들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지구 생태계의 구석구석 그들이 파고들지 않은 곳이란 찾기 힘들다. 그들은 곤충이나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포식자이기도 하고, 이미 죽어서 썩어가는 동물시체의 거의 대부분(90%)을 수거하여 먹어치우는 자연생태계 제일의 청소부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식물 종들은 개미가 아니면 번식조차 할 수 없다. 지렁이가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생태계 전반을 고려할 때, 특히 열대지방으로 갈수록 사실상 개미만큼 많은 양의 흙을 움직여 육상생태계의 영양소를 순환시키는데 크게 공헌하는 동물도 없다.

<ㅉ=130>개미는 이 지구에 우리보다 훨씬 먼저 출현했고 아마 큰일이 없는 한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만일 인류가 멸종한다면 지구생태계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구조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생태계의 안녕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침식탁에도 다른 동물의 몸이 오를 정도로 최고의 포식자이자 안락한 생활을 위해 무수한 동식물들의 삶의 터전을 쑥대밭을 만드는 무자비한 파괴자인 우리가 사라지면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생물계 전체로 볼 때 거의 틀림없이 좋은 방향으로 일어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진 것을 애도할 생물은 아마 바퀴벌레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만일 개미가 사라진다면 지구생태계의 존속마저 위협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물론 개미는 어느 정도 훼손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강인한 생활력을 지닌 동물이기는 하나 그들의 동반자인 식물과 동물들이 사라지면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다. 환경문제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떠밀려 있다. 조금만 더 잘살게 되었을 때 고려하지하고 미루다보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환경을 정화하고 보전하는 일은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 다음 세대가 아닌 바로 우리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물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개미이야기는 내가 그들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는 이야기중의 하나이다. 언젠가 나는 우리 꼬마가 다니던 유치원선생님의 요청으로 예닐곱 살배기 아이들에게 개미 슬라이드를 보여 주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이들은 나에게 앞을 다투어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강연이 끝난 후 나는 우리꼬마와 함께 뒷산에서 채집한 개미군락을 그들의 교실에 설치해 주었다. 얼마 후 전해 받은 편지에 따르면 아이들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개미집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밖에서 놀다가도 개미를 발견하면 발로 짓밟아 죽이던 예전과는 달리 모두 배를 땅에 깔고 개미가 냄새길을 그리는 걸 관찰한다며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을 사랑하게 해줘 고맙다고 했다.

알면 사랑한다. 유럽의 사상가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는 것은 곧 사랑이기도 하다. 알아야 사랑한다. 어설프게 알기 때문에 서로 오해하고 미워한다. 상대를 완전하게 알고 이해하면 반드시 사랑하게 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일단 사랑하게 되면 그를 해치는 일이란 아무리 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하지 못한다. 개천가에 버려진 비닐봉투나 빈 깡통들을 주우라고 가르치는 주입식 교육만으로는 근본적인 자연보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연을 알기위해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하고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일반대중, 특히 다음 세대의 주역인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자연보전에는 전혀 약이 되지 않는 속담이다. 개미 슬라이드만 보고도 무섭다고 비<ㅉ=131>명을 지르던 아이가 내 강연이 끝난 후 내가 개미군락을 설치할 때 돕기를 자청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원광대학교 김병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120종의 개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그만 한반도에 위치한 나라로선 적지 않은 숫자다. 영국 섬 전체나 그리 작지 않은 북구의 나라인 핀란드에 각각 40여 종밖에 살고 있지 않은 것에 비하면 세 배나 되는 종 다양성이다. 물론 열대지방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남미 페루의 어느 열대우림의 경우 그저 8㎥의 면적에 무려 300종 이상의 개미가 서식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심지어는 나무 한 그루에서 43종의 개미를 찾아낸 일도 있다. 핀란드나 영국전역에 분포하는 전체개미 종수와 맞먹는 엄청난 다양성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개미들은 모두 39개의 속(genus)에 속하며, 침개미아과(subfamily Ponerinae), 배잘록침개미아과(Cerapachyinae), 시베리아개미아과(Dolichoderinae), 두마디개미아과(Myrmicinae), 불개미아과(Formicinae) 등 5개의 아과로 나뉜다. 이들 중 불개미아과와 두마디개미아과에 속하는 개미들이 흔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희귀한 편이다.

개미는 워낙 적응력이 강한 곤충이라 아주 높은 고산지대를 제외하곤 어디에나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이나 들은 물론 서울 시내한복판과 심지어는 가정집안까지 개미가 살고 있지 않은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어느 곳에서나 손쉽게 관찰은 물론 간단한 실험까지도 할 수 있다. 요사이 신도시 아파트에는 애집개미(Monomorium pharaonis)라 부르는 아주 작은 개미들이 자주 출몰하여 골치를 썩인다고 한다. 영어 이름은 옛 이집트의 바로 왕에서 따와 일명 바로개미(Pharaoh's ants)라 불리는 이들은 상당히 예외적인 개미들이다. 거의 모든 개미들이 다 처녀 여왕개미가 혼인비행에서 다른 군락의 수개미들과 교미를 마친 후 새로운 군락을 세우는 방식으로 퍼져 나가는데 반해 애집개미의 여왕들은 자기 군락 내에서 남자형제나 사촌들과 교미를 하고 그냥 집에 머문다. 따라서 애집개미의 군락에는 대개 여러 여왕들이 함께 군림한다. 기록에 의하면 한 군락에 2천 마리의 여왕개미가 함께 살기도 한다.

이른바 다수여왕제라 부르는 이같은 조직은 개미사회에서 퍽 드문 현상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국가들이 다 한 절대자에 의해 통치되어 왔듯이 개미국가도 한 여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통례이나 가끔 애집개미와 같은 예외도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처럼 여러 명의 군주가 있으면 나라를 통치하는 면에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또 애집개미처럼 형제나 사촌간의 교미가 빈번할 경우에는 근친결혼의 폐단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여왕제의 결정적인 장점은 쉽게 살림을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교미를 마친 여왕이 몇몇 일개미들을 데리고 어느 곳이든 새로운 지역으로 분가할 준비가 되어있는 셈이다. 애집개미 역시 이런 방식으로 손쉽게 여행자들의 가방이나 화물에 몸을 싣고 그들의 고향인 아프리<ㅉ=132>카를 떠나 전세계 여러 나라의 가정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우리 집에도 애집개미가 산다. 하지만 우리꼬마와 나는 골치를 앓기는커녕 도리어 반가워하고 있다. 도시의 한 가운데에 사는 우리로서는 자연이 제 발로 우리 집안까지 찾아들어 왔다는 것으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 전 어느 케이블방송에서 애집개미문제를 다룰 특집을 준비 한다며 자문을 구하러 내 연구실을 찾았다. 우리 실험실에서 기르는 개미들의 모습도 촬영하고 또 나를 인터뷰하겠다는 취재진에게 개미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 얘기할 예정이면 도울 의사가 없다고 했더니 무척 낭패한 표정이었다. 개미는 일단 출몰하면 구제하기가 바퀴벌레와는 비교도 안 되리만치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해로운 곤충들을 집밖으로 몰아내주는 익충이기 때문에 구제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우리 꼬마와 내가 하듯 아이들에게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게 하면 살아있는 자연교육도 될 것이라는 내 주장에 결국 그들은 기존의 편집방향을 조정하기로 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시청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posted by Saruman
     저녁

                                                   엄원태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이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에 다름 아닌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을…… 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 96쪽
posted by Saruman


손태규, 미디어연구소.
2004년 5월 20일 초판 1쇄.

<ㅉ=77>4) 비교 분석

3개 신문은 정치 기사 작성 스타일에서 서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스트레이트와 해설의 혼합형, 요미우리신문은 스트레이트 치중형, 조선일보는 양쪽의 절충형이라 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요미우리신문이나 조선일보보다 훨씬 긴 기사를 통해, 상세한 사실 전달과 깊이 있는 해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사가 기자의 의견과 판단으로 시작한느 스타일 등으로 미루어 해석적 보도에 충실한 모습이다. 뉴욕타임스가 요미우리신문이나 조선일보와는 달리 정치 관련 단신을 싣지 않는 것도 해석적 보도 스타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ㅉ=78>요미우리신문은 해설 또는 해설성 스트레이트 기사에 비해 월등히 많은 스트레이트 기사는 물론 각종 단신과 안내 기사 등을 통해 가치판단을 최소화하는 대신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많이 전달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서술적 보도의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는 대체로 뉴욕타임스가 선호하는 해석적 보도에 기울고 있는 모습이나 서술적 보도의 형태를 상당 부분 가미하고 있다. 객관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스트레이트 뉴스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기자의 의견을 강하게 반영하는 뉴욕타임스의 정치 기사 스타일은 뉴스와, 의견보다는 객관성을 강조하여 '신문의 전범'을 이룩한 창립자 아돌프 옥스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스스로 '기록의 신문'으로 칭하는 뉴욕타임스의 신화 창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스트레이트 중심의 서술적 보도였다. 옥스로부터 신문사를 물려받아 26년간 뉴욕타임스를 이끈 사위 아서 슐츠버그는 "두려움도 호의도 없는, 공평한 뉴스"를 보도하겠다는 장인의 약속을 대체로 따랐다. 그러나 1961년 슐츠버그의 사임 무렵부터 뉴욕타임스는 불편부당의 전통을 포기하기 시작했다(Kohn, 2003). 언론인이며 언론학자인 딘스모어(Dinsmore, 1969)는 뉴욕타임스가 뉴스와 사설에서 의도적으로, 이른바 자유주의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해석적 보도가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명백하게 이념적 성향을 밝히는 것 이외에 기사 작성의 테크닉을 이용, 뉴스에도 이념적 편견을 주입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Kohn, 2003).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편집국장인 빌 켈러8)는 "모든 저널리즘은 어느 정도 해석적"이라고 공언했다(Keller, 1997). 켈러는 해석적 보도를 배경과 분석을 <ㅉ=79>제공하는 보도라고 정의하고, 어떤 형태를 설명하는 패턴과 동기, 영향을 찾는 것이 해석이라고 설명했다(Keller, 1997). 그는 해석적 보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독자들의 '무엇이 중요한가?',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의문을 신문이 무시한다면 그것은 신문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Keller, 1997). 이러한 해석적 보도는 불가피하게 회사와 기자의 편견이 개입했다는 오해와 의심을 가져오나, 뉴욕타임스는 공정성의 원칙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기자를 고용하며 그들이 사안의 다른 측면, 다른 견해를 보도하도록 끊임없이 교육시킨다는 것이 켈러의 설명이었다(Keller, 1997).

8) 빌 켈러는 1997년부터 2001년 9월까지 편집국장Managing editor을 지낸 뒤 2003년 7월부터는 편집인Executive editor을 맡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스트레이트와 해설을 혼합하는 해석적 보도 스타일에 치중하더라도 풍부한 인용으로 객관성을 높이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의회의 법안 처리 등 공개적 사안을 다루는 기사에는 실명 인용이 익명 인용보다 월등히 많으나 외교 및 안보 기사에는 정반대 현상을 보이고 있음이 분석 결과 밝혀졌다. 뉴욕타임스의 해석적 기사 스타일은 익명 취재원이나 가공 취재원의 과다한 인용 때문에 객관성을 크게 의심받고 있다. 블로우는 41개의 인용 중 40개가 익명인 뉴욕타임스 안보 기사를 예로 들며, "익명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Blow, 2002). 익명 취재원에 의해 기자들이 조종, 통제당할 뿐 아니라 기자의 의견을 보강하기 위해 익명 취재원을 인용하는 등의 폐해를 신랄하게 지적한 것이다.

<ㅉ=80>요미우리신문의 정치 기사에는 실명, 익명에 관계 없이 뉴욕타임스에 비해 인용 자체가 훨씬 적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정부 등의 발표를 그대로 옮기며, 해설 보도라 할지라도 기자의 목소리로 설명, 분석하는 스타일이다. 해설 보도의 경우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익명 취재원 인용을 절제하거나, 단신 또는 안내 기사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보도 방식은 오히려 객관보도에 충실하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조선일보는 요미우리신문보다는 인용 활용이 훨씬 많으나 뉴욕타임스에는 못 미친다. 그러나 정당 등에 대한 기사와 달리 대통령이나 청와대, 외교·안보 기사는 거의 전적으로 익명 인용에 의존하는 방식은 뉴욕타임스와 비슷하다. 특히 조선일보는 가공 취재원 이용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인용이 포함된 기사의 건수가 12건으로 요미우리신문(1건)은 물론 뉴욕타임스(5건)보다 월등히 많았다.

외부 전문가 취재 인용을 포함한 기사가 요미우리신문 1건, 조선일보 2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정치 보도가 지나치게 정부 관리 등에 취재원을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을 실증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7건이었다.

그러나 정치기사가 가십이나 루머에 치중해 선정주의적이라는 비판은 3개 신문에 별로 해당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가십 기사가 전혀 없었으며 요미우리신문과 조선일보도 각각 2건에 지나지 않았다. 각 사의 기사실명제에 대한 태도는 각 사의 정치 기사 스타일을 그래도 반영하고 있다. 기사실명제는 1930년대 들어 뉴욕타임스 등에서 해석적 보도와 함께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객관 보도의 한계를 절감한 언론인들이 주관적 보도에 눈을 뜨면서 기사에 기자의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Schudson, 1978). 기명 기사는 바로 기자의 주관<ㅉ=81>적 해석이 기사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뉴욕타임스의 모든 기사가 기명 기사인 것은 바로 해석적 보도 스타일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요미우리신문은 대체로 서술적 보도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외 특파원 기사 이외에는 기명 기사가 드물다. 조선일보는 대부분 기명 기사이나 1줄 또는 2줄의 짧은 기사에는 작성 기자의 이름이 없다.


참고문헌(위 인용된 것만 발췌: 85-88쪽)

Blow, R. (2002, 19 June). Anonymous sources are back. And that's problem. Retrieved March 22, 2004 from http://www.tompaine.com/feature2.cfm/ID/5819/view/print

Dinsmore, H. (1996). All the news that fits: A critical analysis of the news and editorial content of the New York Times. New York: Arlington House.

Keller, B. (1997, 4 December). At 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 New York forum. Retrieved March 23, 2004 from http://www.journalism.org/resources/education/forums/ccj/forum2/default.asp

Kohn, B. (2003). Journalistic fraud: How the New York Times distorts the news and why it can be no longer be trusted. Nashville: WND Books.

Schudson, M. (1978). Discovering the news: A social history of American newspapers. Basic Books.
posted by Saruman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원제: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지음(1985).
조석현 옮김(1993). 살림터 펴냄.

[196쪽]
  이 부인과 똑같은 기분을 엘 도퍼를 투여한 환자들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나는 그것을 '억누를 길 없는 향수'라고 불렀다. C부인이 말한 것은 분명히 향수였다. 나는 H. G. 웰즈의 감동적인 소설 <벽 속의 문>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그 소설을 이야기하자 "정말로 내 기분하고 똑같네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느낌이나 분위기가 정말 똑같아요. 하지만 내 경우에는 문이 정말로 있었답니다. 물론 벽도 당연히 있었고요. 그 문은 사라진 과거, 잊혀진 과거로 연결된 문이었지요."

[213쪽]
  그러나 환자의 대뇌피질의 한 부분을 자극하면 순식간에 프루스트적인 기억의 환기가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뇌 속의 어떤 기관이 이것에 관여하고 있을까? 뇌의 정보처리와 재생에 대한 현재의 사고방식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산정적이다(예를 들면 데이비드 마의 저서 <환각, 시각제시에 대한 산정적 연구> 참조). 그 때문에 뇌의 기능의 해명에는 스키마타(schemata), 프로그램, 알고리즘과 같은 관념과 용어가 쓰인다.
  그러나 스키마타, 프로그램, 알고리즘 따위와 같은 용어만으로 그토록 풍부한 환각, 우리 인간의 경험이 지닌 시각적, 극적, 음악적 면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경험'을 성립시키고 있는 내면적인 성질까지도 설명할 수 있을까?
  답은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없다'이다. 설령 마와 번스타인 두 사람이 제시한 복잡한 고도의 해석을 동원하더라도 그것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들이 그 분야의 위대한 개척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산정적인 것을 아무리 쌓아올리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도상적인(iconic)' 표현이 될 수 없다. 도상적인 표현이야말로 인생을 짜나가는 '실'이자 '재료'이다.

[328~329쪽: 역자 후기]
  분명히 본서에 실린 글들은 저자가 말한 대로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뇌신경에 무언가 이상이 일어나면 기묘하고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동작과 상태가 나타난다. 본서에 실린 24편의 이야기는 모두 그러한 예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사례들을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거나 흥미본위로 읽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며, 저자의 의도나 진심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병마의 도전을 받아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일상 생활을 단념해야 하는 환자들은 그 나름대로 병마와 싸우며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터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비록 이길 수 없는 싸움이고 뇌의 기능은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색스가 거듭 주장하고자 하는 바이며,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은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 데 약간 주저하면서도 되도록 많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있다. 우리는 24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것을 읽어도 가슴 찡하게 전해지는 그의 환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의 관심이 병 그 자체를 향해서만 기울여졌다면 이다지도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병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의사이기 때문에 본서와 같은 걸작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Saruman
빈 서판(원제: The Blank Slate)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지음(2002).
김한영 옮김(2004). 사이언스 북스 펴냄.


  놀랄 정도로 많은 지식인들 특히 좌파 지식인들이 선천적 재능 특히 지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1981년 베스트 셀러 『인간에 대한 그릇된 평가(The Mismeasure of Man)』을 발표했는데, 이 책을 쓴 목적은 "지능을 하나의 실체로 독립시키고, 뇌 안에 그 위치를 정하고, 각 개인을 지능 지수라는 하나의 숫자로 평가하고, 그 숫자를 이용해 사람의 가치를 단일한 등급으로 배열하면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집단-인종, 계급, 성-이 선천적으로 열등하며 현재의 지위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지능이란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에 특수한 이른바 "엘리트주의"라는 이론의 한 요소라 주장했다.


[  경쟁의 정도가 낮았던 사회 조직에서 엘리트주의 이론은 충분히 다른 이론-평등주의 이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이론에서는 보통 사람이 (1) 높은 동기를 부여받았을 때, (2) 집단적으로 일할 때, 관심이 가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또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다시 말해 우리가 충분한 동기를 부여받고 집단적으로 노력하면 리처드 파인만이나 타이거 우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능의 존재를 부인하는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 참으로 초현실적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지능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학생의 입학을 고려할 때, 교수진과 직원을 고용할 때, 특히 남의 결점에 대해 험담을 주고받을 때 끊임없이 지능을 거론한다. 국민이나 정책 결정자들도 그들의 정견에 상관없이 지능을 무시하지 못한다. 지능 지수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지능 지수가 64인 살인자를 처형하는 문제나, 어린이의 지능 지수를 5점 떨어뜨리는 납 성분이 든 페인트를 추방하는 문제나, 조지 W. 부시가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로 넘어오면 즉시 지능 지수를 들먹인다. 어찌 됐든 오늘날 지능은 개인의 안정된 자질이고, 뇌의 특징들(전체적 크기, 전두엽의 회색질의 양, 신경 전달의 속도, 대뇌의 포도당 신진 대사 등)과 연결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개인들 간에 유전되고,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삶의 성과에 있어 어느 정도 차이를 예측하게 해 준다는 증거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선천적 재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회 다윈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전자가 후자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우려는 두 가지 잘못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유전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토론을 종종 오염시키는 모 아니면 도 식의 사고 방식이다. 선천적 차이가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요소일 가능성이 유일한 요소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순수한 운, 물려받은 유산, 인종적·계급적 편견, 불평등한 기회(가령 교육이나 인맥 형성의 기회), 문화적 자산(경제적 성공에 도움이 되는 습관과 가치관) 등이 포함된다. 재능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편견과 불평등한 기회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유전적 재능이 사회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성공이 도덕적 의미에서 당연한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다윈주의는 진화를 살펴보면 옳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좋은” 것은 “진화적으로 성공한” 것이다.-는 스펜서의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의 불명예스런 참고 사례로 남아 있다. (스펜서는 또한 사람들의 사회적 성공-부, 권력, 지위-을 그들의 진화적 성공, 즉 생존 가능한 후손의 숫자와 혼동했다.) 이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이름은 윤리 철학자 G. E. 무어가 1903년 『윤리학 원론』을 통해 스펜서의 윤리학에 치명타를 날리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무어는 이른바 “흄의 기요틴”, 즉 어떤 것이 참이라고 아무리 설득력 있게 증명해도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반드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는 논리를 적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현명하다고 지적했다. “진화적으로 더 성공적인 행위이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이 질문이 타당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진화적 성공과 선이 별개임이 입증된다.
posted by Saruman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ylan Thomas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posted by Saruman